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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ansion 검은 저택  

     펜잔스 지역에서도 가장 외진 남서쪽 높은 언덕 끝에는 거대한 저택이 하나 있다. 한때 절벽 끝을 지키던 아름다운 저택은,

     화재의 여파로 외벽이 검게 그을려버렸기에 모두가 입을 모아 검은 저택이라 부른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끊어진 절벽에 설치된 도개교뿐이다. 도개교는 대체로 항시 올라가있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는데,

     펜잔스 백작이 살던 시절에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내려오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의 화재사건 이후로, 도개교가 내려온

     날은 적어도 목격된 바가 없다.

     영국 서남쪽 끝단의 펜잔스 지역 일대를 소유한 펜잔스 백작가는 굴지의 귀족 가문이었다. 넓은 바다를 소유한 가문은

     그 바다에 인접한 수많은 무역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많은 귀족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무너져 내릴 때,

     그들만은 그 이름과 명성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5년 전, 새로운 무역항 개항을 앞둔 어느 날 펜잔스 백작 가의 저택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한다. 거짓말처럼 하늘을

     수놓은 불꽃에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Count Penzance 펜잔스 백작 

알란 T. 펜잔스 (Alan Titchmarsh Penzance)

펜잔스 영지의 마지막 백작. 

선대가 일궈놓은 부유한 영지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으며, 온실 속 귀족이라는 평이 있었던 듯.

어진 성품으로 영지민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건 당시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였다.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 덕분에 잿더미가 된 유해를 간신히 발견하여 수습할 수 있었다. 

달시 B. 펜잔스 (Darcey Bussell Penzance)

펜잔스 백작 부인.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보내진 여식. 독실한 신자였으며, 다정다감하고 완벽한 귀부인이었다. 사건 당시 마흔넷. 

엠마뉴엘의 시신과 함께 발견. 훼손 흔적이 거의 없었고, 질식사로 추정된다. 

그라함 T. 펜잔스 (Graham Thomas Penzance)

장남.

총명하여 친지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막내 동생인 윈드미어와 우애가 깊었다. 사건 당시 십육 세.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장례는 치뤄졌다. 

엠마뉴엘 펜잔스 (Emanuel Penzance)

장녀.

어린 나이에 이미 혼약자가 있었다. 사건 당시 십오 세. 

어머니인 달시의 시신과 함께 발견. 훼손 흔적이 거의 없었고, 질식사로 추정된다. 

윈드미어 B.펜잔스 (Windermere Banhart Penzance)

차녀.

모든 이의 사랑 속에 우환 없이 자란 막내딸. 열 한살을 맞이하지 못한 채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동정을 일으킨다.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장례는 치뤄졌다. 

Penzance Family 펜잔스 일가 

펜잔스 백작
검은 저택

   ‘그 날’을 기억한다.
   검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저택을 검게 그을려 그 흔적을 남기고, 옷자락은 빗줄기에 젖어들어 새카맣게 물이 들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혀 숨을 쉬기 힘들었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울음도 비명도 파도소리도 집어 삼켜지던 그 날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과 그것이 매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각인되어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는 다른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그 기억을 묻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날’의 모든 일이 필연이었다면, 그 책을 내가 가지게 된 것은 결단코 우연이다. 혹은 악마의 농간이거나.
   나는 길을 가다 우연히 그 책을 주웠고, 혹은 서점을 지나다 무심코 구매하였으며, 어쩌면 어느 날 배달부의 실수로 우편함에 들어온 책을 그대로 돌려주지 않은 걸 수도 있다. 수많은 우연의 결과로 나는 그 책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그 책을 내가 읽어버리고 만 것 또한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어야만 했다.
   글을 읽는 게 업인 사람도, 혹은 글이라곤 평생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도, 모두 그 책을 읽었다. 호기심에 책장을 펼쳐봤을 수도, 제 아이가 읽어 달라 조르고 졸라 어쩔 수 없이 펼쳤을 수도 있다. 글자를 모르는 나도 어째서인지 그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세상의 온갖 글을 읽어야만 하는 업을 가졌을지도 모를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우연 사이에서 필연을 느끼고 만 것은 그 기이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흰 종이에 새겨진 까만 글자를 통해 ‘그 날’을 되새김질해야만 했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하늘을 불꽃이 수놓으며, 울음도 비명도 파도소리도 집어삼켜지던 바로 그 날을 말이다.
그러니 그 하잘 것 없는 우연이야말로 악마의 농간일지도 모르지.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날이었으리라. 영국의 아침은 언제나와 같이 자욱한 안개로 가득하다. 거리에는 이르게 아침을 시작하는 어린 신문배달부가 호외를 외치며 뛰어다녔고, 거리마다 따스한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마차는 바쁘게 거리를 달렸고 사람들은 여전히 타인의 불행에 무심한 채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이함조차 잊어버릴 것 같은 보통의 날, 그 순간.
   나는 검은 비가 내리는 환상을 보았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와 파도 소리를 느꼈다. 검은 비는 내 온 몸을 적시는 것만 같았고, 매캐한 냄새 탓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멀어지는 그 순간, ‘그 날’의 기억 속에 불타오르던 저택의 환상이 보인 것만 같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검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 ? ? 검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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