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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183cm

남성

72kg

​중류 계급

신부

“ [신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
라엘 그레이스 Lael Grace

  당신이 바스러질 듯 맑은 아침 햇살 속을 산책하는 그를 본다면, 순간이나마 교회 주변에 있는 성스러운 대리석 조각들과 혼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화가 비켜나간 사람처럼 말갛고 하얀 피부와 순백의 머리칼은 회색 눈동자와 대조된다. 눈매와 입꼬리는 전혀 사납지 않고 다정스럽다.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락함을 느끼게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교회 특유의 향과 비누 향기가 은은히 묻어 나온다. 자세는 늘 곧고, 몸가짐은 정갈하며, 움직임 하나하나엔 품위와 기품이 뚝뚝 떨어지는데 귀족 특유의 오만함은 없다. 성자란 분명 이런 이를 보고 일컫는 것이겠지. 인간의 성스러움을 가늠하는데에 외양은 결코 그 판단 기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 속에 기록된 성자들을 상상하는데 그를 이용한다.

  그의 성격은 사람들이 그의 외모를 보고 예상한 성품 그대로이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봉사하고, 자신이 이룩해낸 선행에 비해 더 없이 겸손하다. 따뜻한 품은 우는 아이도 금세 웃게 만들고, 상식적인 사고관에 평정심을 쉽게 잃지 않으며 사람들의 불안감을 잠재우는데에 능숙하다.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이 없는듯 씀씀이 또한 검소하다. 종교의 역할이 으레 그렇듯이, 펜잔스 영지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일정 부분을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분명 있을테지만. 어쨌든 그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알고 있으며, 작은 장애를 앓고 있다는것만 제외하면 나무랄데 없이 완벽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 8년전 펜잔스 지역사회에 나타난 희고 젊은 신부라고 하면 라엘 신부를 일컫는말이다. 교양 있는 몸가짐과 귀족의 것이 분명한 발음, 겸손한 태도 속에서도 언뜻언뜻 가늠되는 학식, 무엇보다 펜잔스 일가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이루어왔던 그가 필시 고귀한 출생이라는 추측은 지역 내에서 기정사실화 되어있다. 신부는 펜잔스 부부와 친밀한 관계였으며 백작에게 영지민들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자주 저택에 방문하곤 했다. 항간에는 그가 어느 귀족 가문의 서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꽤나 설득력 있게 떠돌고있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작게 미소 지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2. 5년전 사건 이후 며칠간 독한 감기를 앓으며 식음을 전폐했다. 사건 현장에는 없었으나 멀리서 저택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충격의 후유증으로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정확히 말해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가벼운 의사소통은 손짓과 구화로 가능하나 그 이상의 것들은 필담을 통해야만 하기에, 그에게 휴대용 만년필과 검은색 수첩은 성경 만큼이나 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검은 가죽 커버로 덮인 수첩 안에는 그가 문맹이 아닌 이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들로 빽빽하다. 종종 글을 모르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실력은 형편없다.

 

3. 그는 더이상 사람들에게 성서를 읽어주지 못한다. 교리를 읊어주지도 못한다. 성가를 부르지도, 소리내어 기도문을 외우지도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작은 기능을 상실한 사제를 가엾어 하며, 이웃의 비극을 제 비극처럼 여기는 성품을 성스럽다 칭송한다. 여신도들은 가진 나이와 직위, 재산에 상관 없이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이다. 고해성사가 진행되는 고해실은 먼저 와 있는 얼굴을 보고 민망함을 느낄틈도 없이 붐빈다. 단 두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고해실 벽은 자신의 죄를 고하고자 하는 자들의 목소리로 축축함이 마를날이 없다. 아주 시시콜콜한 거짓말이나 실수따위 부터 혈육에게조차 결코 말 할 수 없는, 말 하지 말아야할 죄까지. 드넓은 펜잔스 영지의 수많은 비밀들을 대신 삼켜내어 주고 있는 그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 축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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